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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물”고향탐상(古鄕探想)

 

5대 회장 규정공 25세손 영석(影石) 의환(義煥)

 

‘전우물’은 평안도 중화(中和)땅 어느 옛 고을에 구전(口傳)되어온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은 밀양박씨의 누대(累代) 집성촌(集成村)이라고 한다.

해방 후 이북5도청(道民會)에서 발간한 평안남도지의 중화군편에 의하면 신흥면(新興面)에 칭우리(秤隅里), 칭정리(秤井里) 두 마을이 있는데 “칭우리(秤隅里)에는 밀양박씨가 48호 거주”로 표기하고 있어, 평우리(枰隅里)인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고서(古書)에는 한자로 칭천(秤泉), 칭정(秤井), 칭천(秤川)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뜻밖에 최근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향토대백과(평화문제연구소에서 북한 전역에 자연 인문지리정보를 집대성하여 남북교류협력 및 통일 후 국가건설자료로 발간)에서 조회 결과 중화군(中和郡) 신흥면(新興面) 평우리(枰隅里)는 1952년에 평양시 강남군(江南郡) 신정리(新井里)로 개편되었으며, 단 평우리(枰隅里)의 유래는 1914년 일제(日帝)때 행정구역 통폐합 이후의 명칭이고 그 이전에는 “저울물 모서리마을”로 칭우리(秤:저울칭 隅:모서리우)로 부르다가 칭(秤)자를 枰(바둑판 평)자로 바꾸어 평우리(枰隅里)라 하였다. 칭(秤:저울)자를 비슷한 평(枰:바둑판)으로 오기(誤記)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전우물”은 저울 우물을 줄여서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우물이 마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우물 모서리에 있다는 표현은 어쩌면 이 우물이 범천(凡泉)이 아니라 명천(名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된다.

“전우물”이라는 말은 1999년 대동보(大同譜)의 기고문(寄稿文)에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나는 문중의 최장노(最長老:나이 많은 노인)로 고향 마을 이름조차 사라진 근황에 접하여 매우 깊은 감회와 고향인“전우물”에 직접 가보지 못한 안타까움과, 갈 수도 없는 곳이라는 아쉬움을 안고, 그간 성장 과정에서 듣고 본 자료들을 보관 관리하면서 느껴진 소회(所懷)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자 한다.

 

▣ 파조(派祖)인 절도사공은 단묘순절정의제신(端廟殉節靖義諸臣)(端宗忠義錄)으로 재직(在職)했던 중화부사 겸 북평절도사(中和府使 兼 北平節度使)를 투인(投印) 기관(棄官) 은거(隱居)하다 사후(死後)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목제리 정이산 부근에서 유택(幽宅)을 정하고, 무려 16대를 누거(累居)하다가 1894년 갑오 동학란을 피하여 증조모께서 42세 여인의 몸으로 4명의 아들 중 둘째 아들을 그곳에 잔류(殘留)케하고 3명의 아들을 데리고 월남하여 충북 음성에 이르러 짐을 풀고 정착하셨다.

천리 길을 어떻게 도보로 남하하였는지는 알고 있는 사람을 찾을 길도 없어 미상(未詳)지만 그때 그 큰 봇짐의 운반한 집념(執念)에 대해서는 새삼 그 노고와 고견(高見)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 봇짐 속에는 가묘(家廟)의 신주(神主) 위패, 선대교지(先代敎旨), 가계문적(家系文籍), 선대문집(先代文集), 기타 수필, 고서(古書) 등 다수(현재 50여권 보관 중)의 희귀한 자료는 매우 소중한 가보(家寶)가 아닐 수 없다. 그 고서(古書) 등에 의하여 파조(派祖)의 묘비문(墓碑文)과 묘비개수(墓碑改竪) 등 묘소관리를 주관해온 문중임에 자긍심을 갖게 된다.

 

▣ 파조(派祖)인 절도사공의 후손들은 1742년 규정공파 대동보(大同譜)인 (임술보)壬戌譜에 23개 파종(派宗)으로 분파(分派)되었음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1966년에 비로소 선친인 정학(楨學) 송암공(松岩公)(1897~1978)께서 파종(派宗)을 창건(創建) 2대 회장으로 제1차 파보(派譜)를 창간하였으며, 전우물의 봇짐이 창간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 유년기(幼年期)에는 함께 남하한 조모, 종조부 그리고 선친(장손으로 북한 쪽의 재산 관리)께 이야기를 들었으며, 성년이 되어서는 문중 모임에 자주 참여하였고, 6.25 후에는 선친의 권유로 북진경찰(北進警察)에 자원하였으며 스스로 월남민으로 자처하고 이북 친구들과의 교우(交友)가 많았다.

 

▣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해방 직전 이북에 남은 종조부의 손자 즉, 6촌 형이 서울 우리 집에서 유학하다가, 해방 전에 병사(病死)하는 바람에 통신이 두절되어 백형(伯兄)이 월북해서 종숙(從叔)을 모시고 남하하였다가 다시 월북 이후 소식이 단절되었다. 이북에는 1년 연하의 6촌 동생이 있어 남북 상봉을 추진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만고(萬苦)를 무릅쓰고 현재 문중의 정착과 번영을 이룩하신 증조모(曾祖母)의 위업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한 차원에서 기립묘비(旣立墓碑 : 한문으로 된 묘비로서 종조부(從祖父) 진재공(眞齋公)께서 쓴 묘비(墓碑)-진재공(규정공 23세손 覬永) 기호학파(幾湖學派) 전우(田愚) 간재(艮齋)의 문인(門人)를 한글로 번역하여 큰 비석(碑石)을 옆에 건립(2012. 4)하였다. 새삼 “전우물 마을”이야말로 파조 절도사공의 묘소를 지켜며 살아온 선대의 수백 년에 걸친 터전이었기에 오늘날 우리 후손들의 고향임을 다짐해본다.

 

▣ 파조의 묘비문(墓碑文) 에는“절도사공의 벼슬은 서북지방(西北地方)에서 마치시고 중화군 정이산(定夷山)에 안장되면서 자손이 묘소 곁에서 의지하며 수백 년을 살고 있으며 특히 시묘(侍墓)를 했던 셋째 아들인 휘 권(權)의 후손들이  5세(五世)가 지나도록 정이산 부근에 지금도 살고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6대조 홍계(鴻啓 : 栢岳齊公)의 주선으로 묘비(墓碑)를 개수(改竪)하였다.

 

▣ 7대조 가선대부 문혁공(嘉善大夫 文赫公) 묘비문에는 전우물 즉, 칭천(秤泉)을 찬미하면서“칭천(秤泉)의 물은 감미(甘味)롭고 토지가 비옥한 박씨촌“이라고 적고 있다.

 

▣ 당시 평안남도지 중화군편에 의하면 중화군내 밀양박씨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

    - 신흥면 평우리에 48호

    - 양정면 신계리에 47호

    - 상원면 문산리에 35호

    - 당정면 신라리에 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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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안남도 중화군 지도(1952년 행정구역 개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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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면 평우리(枰隅里) 전우물(지도에 저너물로 표시되어 있음) 밀양박씨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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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안남도 강남군 해압면(海鴨面) 목제리(睦齊里) 절도사공묘 위치

 

※ 지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중화군(中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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