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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빛낸인물

 mark.png 박재혁 의사

 

박재혁(朴載赫)의사 순국 100주년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사나이

청암 박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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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사 약력 (비문에서 발췌)

 

* 1895년 05월17일 - 동구 범일동 183에서 박경순(敬順)과 이치순(致順)의 독자로 출생  

* 1911년 03월22일 - 부산진공립 보통학교(현/부산진초등학교)를 졸업

* 1912년 ~1914년 -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학교 친구와 정공단 친구와 함께 ‘동국역사 배포 사건’, ‘구세단’ 활동을 하여 일경에게 고초를 겪음

* 1914년 03월22일 - 부산공립상업학교(현/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

* 1916년 - 상해의 중화국청년회관(中華國靑年會館)에 입학하여 여학을 공부

* 1917년 06월     - 싱가포르로 건너간 후 무역상을 하며 상해와 부산을 오가며 인삼 무역 등을 거래, 독립투쟁을 모색하였다.

* 1920년 04월19일 - 의열단장 김원봉과 접촉한 후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일시 귀국

* 1920년 08월     - 의열단장 김원봉으로 부터 거사자금 300원과 폭탄등을 지원받다.

* 1920년 09월 6일 - 상해를 떠나기 전 서장 하시모도(교본수평(橋本秀平))가 고서(古書)를 좋아한다는 정보 입수 고서적상으로 가장하기 위해 고서를 한 짐이나 되게 준비 나가사키를 거초 대마도를 거쳐 부산 입국.부산으로 돌아와 오택의 집에 폭탄을 숨기고 최원택, 김영주와 함께 동래온천장, 해운대, 범어사 등지에 머물며 실수 없는 거사를 모의했다

* 1920년 9월14일 - 의거를 위해 경찰서로 가던 중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보냈던 마지막 편지의 내용이다.

《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형편이 뜻대로 되어가니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염려해준 덕분인듯 합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하고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서장에게 면회를 신청, 얼마 후 서장의 허락을 받아 2층 서장실로 들어감. 식탁을 사이에 두고 고서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고서적에 눈이 팔린 서장에게 전단(傳單)을 보인 다음 유창한 일어(日語)로 꾸짖었다.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는 것이다.”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폭탄을 던졌다. 굉음과 함께 들이 쓰러졌는데 서장은 병원운송 도중 사망, 박재혁은 중상, 체포되어 투옥됨

* 1920년 9월14일 - 오택(오재영), 최천택, 김영주 등 정공단 친구들이 체포되어 취조

* 1920년 10월5일 -부산경찰서 투탄과련 보도통제가 해제, 친구들은 불기소 석방

* 1920년 11월6일 -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다.

* 1921년 2월14일 - 대구 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다.

* 1921년 3월31일 -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다.

* 1921년 5월12일 - 대구형무소에서 단식투쟁 중 27세로 옥중 순국했다

* 1921년 5월14일 - 부산 좌천동 부산잔공동묘지에 안장

* 1921년 10월    - 부산 유지들이 정공단에 “의사 박재혁비”를 세움

* 1962년 3월1일 -  건국공로훈장 단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다.

* 1966년 4월7일 -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다.

* 1969년 10월20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애국지사-76)

* 1981년 5월 8일 - 정공단의 박재혁비를 부산잔초등학교로 옮김

* 1998년 5월12일 - 부산어린이대공원에 박재혁 의사 동상을 세웠다.

 

1919년 11월 의열단이 결성된 후 일제 고관의 암살 및 중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한 의열단의 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은 1920년 3월에 개시되었다. 곧, 같은 해 3월 중순 곽재기가 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밀양의 김병완(金炳完)에게 보낸 폭탄을 경기도 경찰국이 탐지 수색한 결과 폭탄 3개를 압수하여 관계자 18명 중 곽재기 외 12명을 체포하였다. 다시 같은 해 5월 중순경 단원 이성우(李成宇)가 폭탄 13개 및 권총 2정을 입수하고, 중국의 안동현 이륭양행(怡륭洋行)을 통하여 경남 진영(進永)의 강원석(姜元錫)에게 보낸 것을 일경이 탐색 압수하고 관계자 윤치형(尹致衡)외 6명이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같은 해 6월에는 곽재기, 이성우를 비롯한 의열단원 전원이 검거되어 취조를 끝내고, 10월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여기에 관련자는 곽재기(郭敬, 29), 이성우(李成宇, 22), 김기득(金奇得, 23), 박낙준(朴落俊, 31), 황상규(黃尙奎, 30), 윤소룡(尹小龍 尹世胄, 22), 김병환(金秉煥, 32), 신철휴(申喆休, 24), 이주현(李周賢, 30), 윤치형(尹致衡, 29), 강상진(姜祥振, 35), 김재수(金在洙, 34), 곽영조(郭永祚, 31), 강원석(姜元錫, 32), 배중세(裵重世, 27) 등으로서, 대개 3 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복역한 바 있는 인물들로 모두 16명이며 강원석 1명만 면소 방면되고 나머지 15명은 모두 유죄로 결정되어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붙여졌다.

 

의열단의 제1차 활동으로 시작된 폭탄계획은 결국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일경 당국에 탐지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를 거울삼아 의열단의 다음 거사는 보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아래 추진되었는데 그 첫 실행이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 투탄의거로 나타났다.

 

박재혁(朴載赫 ; 1894~ 1921)은 원래 부산 범일동(凡一洞)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함에 따라 일제의 침략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지니게 되었고 언젠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무역항이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일찍부터 중국의 상해 등지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 등지를 왕래하면서 무역을 경영하는 한편 망명 우국지사들과도 사귈 수 있는기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1920년 7월, 그는 의열단에 정식으로 입단하고, 그 목표를 부산경찰서 폭파로 정하였다. 부산경찰서가 그 목표로 떠 오른 것은 앞서 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의 실패로 여기에 관련되었던 동지들의 대부분이 검거당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특히 곽경(郭敬)은 관연자 중 준심이 되었다. 부산을 근거지로 삼고 동지들과 연락하여 모든 거사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던 중에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어 많은 동지가 일경에게 체포된 바 있었다.

 

1920년 8월 하순 의열단에서는 싱가포르로 전보를 쳐서 그곳에서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박재혁을 상해로 소환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부산경찰서 폭파와 서장총살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는 의열단 공약 전 10조 중 제7조에 있는 "언제 어디서나 초회(招會)에 반드시 응한다"는 단명에 의하여 상해로 온 것이었다.

열사는 의열단의 처음거사가 실패한 뒤 2번째 거사로 최초로 성공한 인물입니다.

아래는 의사의 의거 행적입니다.

그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면서 곧 재판이 열려 사형언도를 받고 복심 고등법원을 거쳐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손에 죽느니보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신념아래 그는 쇠약해진 몸으로 단식을 시작하여 9일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재혁은 1921년 5월 27일 대구감옥에서 27세의 짧고 젊은 생애를 오직 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순국으로 마감하였다.

 

 

추념사(追念辭)

 보라, 여기 장대한 청년이 있다

 한 번을 살더라도 제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준 청년

 살아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한

 의열단원의 장대한 청년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민족해방전선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립투쟁전선에서 기록도 없이 죽어갔는가

 오늘, 우리는

 단 한 줄의 기록으로 남는 사람들을

 단지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다짐하여야 한다

 

 박재혁,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를 한 자랑스러운 의열단원

 보라, 여기 죽음에 당당히 맞서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청년, 의열단원 박재혁을 보라

 오로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웅변한 사람이다

 자랑스러운 부산의 청년,

 치욕스러운 죽음을 넘어 자진 순국한

 장대한 청년, 의열단원 박재혁을 기억하라.

 

 

*열사(烈士) : 물질상의 이해나 권력에 대하여 굴하지 않고 절의를 굳게 지켜 생명을 던지는 사람

*의사(義士) : 의협심이 강한 사람. 무기나 기타의 방법으로 항거하는 사람.

*지사(志士) : 고매한 뜻을 가진 사람. 국가나 사회를 위해 일신을 바쳐 봉사하려는뜻을 가진 사람, -애국지사

 

가계도(家繼圖) 규정공후절도사공

절도사공 박대손(朴大孫 7세)→량(樑 8세)→수창(修昌 9세)→자빈(子彬 10세)→진갑(震甲 11세)→인석(仁碩 12세)→영복(榮福 13세)→의남(儀南 14세)→계청(繼淸 15세)→이영(以永 16세)→시채(時彩 17세)→성원(聖元 18세)→익만(益萬 19세)→인백(仁佰 20세)→자중(子仲 21세)→근학(根鶴 22세)→경순(敬順 23세)→재혁(載赫 24세)→기동(基東 25세 系子)→정천(正仟 26세)→규빈(規斌),준서(浚序 27세)

 

*사진, 자료제공 : 박재혁 의사의 증손(曾孫) 준서(浚序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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