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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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생애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1-27 20:27 조회152회 댓글0건본문
제목 : 족보의 재발견
족보의 역사는 고대 중국에서 제계라는 제목으로 황실의 계통을 밝히는 제왕연대를 기술한데서 비롯 하였으며 개인이 족보를 갖게 된 때는 한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에서 응시생의 내력과 그 선대의 업적 등을 기록하게해 심사한 뒤 등급을 매겨 구분하고 명문집안이 아니면 고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지면서부터 족보가 발달하게 된걸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조선왕조 계급사회의 산물로 조선중기 이후 당쟁이 성하면서 양반의 혈통 및 동족관계를 기록한 족보가 다투어 만들어져 양반의 신분 및 족당 관계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었다. 종 으로는 혈통관계를 밝히고 횡 으로는 동족관계를 기록하고 있었고 그러한 족보를 외는 소위 보학은 양반이 지녀야 할 필수 지식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족보는 가문의 조상을 높이고(대부분 부(父)계) 그 조상으로부터 갈라져나온 일족들을 모아 그 상·하 수평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족보에 실린 인물들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 즉 신분을 밝힘으로써 부계로 연결된 동족간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보법이 행해지지 않으면 파류를 증명할 길이 없었기에 시대가 거듭 반복 되면서 족보에 기재되는 혈연관계도 생물학적 친연성에 더해 사회학적인 결합 상황과 연계되어 생물학적인 혈연보다 혈연의 사회적의미가 더욱 강조되기도 해 다산 정약용은 족보 위조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의 우리는 일반적으로 족보를 운운 하면서 자신들의 조상의 위대함에 따른 자기자신의 위치를 부각하면서 족보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살아가고 있는게 현실이다.
지난 2023년 2월 어느날 이제 나이가 70세 가까이 된 만큼 우리 문중의 역사와 나의 집안 조상님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족보책을 꺼내 들고 몇 날 며칠을 적고 수정하며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 밀양박씨 절도사공파 종회(회장 세봉)를 찾아 뵙고 재실(齎室 : 휘 대손 선조님을 모시는 곳)에 들어서니 부모님께서 다녀가신 기념사진들을 보고 앞으로 적극 종회 발전을 위하여 참여 하겠다고 하니, 회장님께서 지금 인터넷 족보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하셨다.
즉 지금은 시대 흐름에 맞추어 족보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보는 시대이기에 우리 절도사공파도 인터넷 족보를 만드는데 프로그램 사용과 기록정리 관리 등 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극 참여를 약속 하였더니 종회에서 밀양박씨 절도사공파 종회 홍보이사 직책을 부여받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 기록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그 며칠 후 우리집 베란다 집수리공사를 사촌 동생에게 부탁을 하고 공사 후 점심을 하기 위해 동생부부를 불러 용두동 식당에 들어서니 칸막이 방으로 안내를 받는데 옆 테이블에 단정하신 여사님(한 70 중반쯤)께서 우리가 두 테이블을 예약 했는데 한 테이블 취소로 젊은 분들이 행운이라며 생색을 내신다. 나는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는,
편한 마음으로 메뉴를 보고 음식 주문을 한 후 집수리공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옆 테이블 여사님들이 남원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는 다 남원 사람이기에 옆자리 재수씨가 “아니 왜 남원이야기를 하세요?” 하니, 옆자리 여사님이 “제가 남원 사람이라 남원이야기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하신다. 우리 일행이 합창으로 “남원 어디신데요?” 하니, 여사님들도 합창으로 “주생이요” 하신다. 우리 일행은 “주생 어디신데요?” 하니, “정송이요” 하시며 그 말끝에 “그럼 그 쪽은 어디신데 꼬치꼬치 물어요 하신다”.
그래 우리는 합창으로 “제천이요” 하며 우리는 다 웃음바다가 되었다...
참고로 남원시 주생면에 정송리, 제천리 외 아홉 마을이 있고 주생초등학교가 있다.
정송은 우리 고모님 시집이신 마을이며 어렸을 적엔 기찻길 따라 형들과 설 세배하러 가는 커브길 기차 기적소리에 놀라 꽁꽁언 또랑으로 자빠지고 숨느라 흙 묻은 옷으로 고모님댁을 찾은 아름다운 기억이 있는 마을이다.
우리 두 테이블은 다 주생초등학교 동문들이다... 내 6촌 누님(주생초교28회)과는 동창생으로 매월 모임으로 만나고 있다 하신다, 정송리에 나의 친구들의 이름을 몇 명 물으니 그 친구들은 같은 동네 옆집에 사는 동생뻘로 어렸을때 내가 업에서 키운 애라고 하시는데 참 기막힌 만남의 시간이였다. 헌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 정송 마을은 양씨가 많은데 처음에 단정하게 말씀하신분이 제천 박씨란다. 왜 제천 박씨냐고 물으니 부모님께서 제천서 사시다 정송으로 이사 왔기에 제천 박씨라고 한단다. 제천 박씨의 가족사가 또 기가막히다. 아버님께서 주생역 주변에서 양복점을 하셨는데 일찍이 돌아가시고 두 자매는 할머니 손에 어렵게 자랐고 족보에도 못 올라가 있어 친구들이 족보도 없는 년이라 농담으로 하는 말이 그렇게 서러웠단다...
그래서 제천 박씨 찬련여사님(선배) 부모님과 가족들 이름을 메모하고 촌수를 보니 조카 이시다. 즉 저는 재근(在根), 찬련여사님 아버지 휘 두식(斗植)으로 뒷글자가 나무목(木)자 돌림이니 나와 찬련여사님 아버지와는 같은 항렬이니 형님이 된다. 아~ 그런 아품이 있으시다니...
제가 말양박씨 절도사공파 종회 홍보이사로 일하고 있고 지금 인터넷 족보 등재업무가 진행중에 있으니 책임지고 족보에 등재해 드리겠다고 하니 찬련여사님이 앞 경순 친구에게. 야! 나 이제 우리 아재 덕분에 족보 있는 년이야 까불지마~ 하시고는 술 한잔 들자며
오늘의 만남을 감사해 하신다. 그로부터 약 2주후에 등재 완료된 족보를 전달하였더니 족보를 꼭 끌어안고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는데 족보에 부모님 자식으로 당당히 기록된 기쁨의 눈물이라 생각했다.
족보의 기록에 대한 문제점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족보는 옛날부터 부(父)계중심의 기록이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불가항력인 일로 족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며, 내가 종회 홍보이사 직책을 맡으면서 찬련조카님 족보를 재 발견하고 기록한데 대해서 보람을 느낀다.
고향 초등학교 선배님 이시고, 나이로는 누님이시고, 족보상으로는 찬련조카님!
사라질뻔했던 족보를 재 발견했으니 밀양박씨 절도사공파 후손으로 사랑스런 부모님의 자식으로 당당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살아가시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 찬련 조카님 족보(아버님 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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